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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음식/사찰음식에 관하여

한국 사찰음식의 역사 - 삼국시대부터 현대까지

by 오몽실 2024. 10. 18.

진관사 스님이 555년전의 두부찜을 재현하고 있다.
진관사 스님이 555년 전 두부를 재연하고 있다. (출처-연합뉴스)

 

삼국시대

삼국시대에는 농경이 확립된 사회였기에 오늘날의 식생활과 유사하게 쌀, 보리, 콩 등을 주식으로 하고 장류, 장아찌를 부식으로 하는 식생활이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은 각각 고구려 소수림왕(372년), 백제 침류왕(384년), 신라 법흥왕(528년) 시절에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는데 초기의 불교는 왕실의 보호 속에서 성장하여, 궁중음식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왕실과 상류층을 중심으로 불교가 퍼지면서 불살생의 불교 계율에 입각하여 통치를 하려고 했다. 그래서 일반 국민들의 식생활에 사찰음식이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육식을 해서는 안된다'는 불교의 계율이 국시가 된 것이다. 그리고 왕실과 귀족들이 앞다투어 채식을 권장하였고, 이를 통해 불교적 식생활은 일반 민가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하지만 신라의 경우에는 훗날 원광법사가 만든 세속오계 규범 중에 '살생유택'이라는 조항에서 보듯 육식을 엄격히 금지한 것은 아니어서 어느 정도의 육식은 허용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우유의 경우,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대에는 귀족층 사이에서 우유가 식용되고 있었지만, 일반 서민들의 식생활에까지는 정착되지 못하였다. 이렇듯 불교가 우리의 토속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어울려 발전했듯이 사찰음식 또한 고유의 한국 토속음식과 조화롭게 섞여 발전해 왔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숭불정책으로 불교가 융성기를 맞이한 시기였다. 육식을 멀리하고 채식하는 문화를 권장, 확산됨에 따라 사찰음식도 더욱 발달하게 된다. 차는 불교의 전파와 더불어 함께 전래되었고 스님들의 좌선수행에 있어서는 필수 음료였으며, 차를 마시는 습관은 나라 전체에 널리 성행하게 되고, 그에 따라 차를 마실 때 사용하는 다기도 매우 발달하게 되어 고려청자와 같은 훌륭한 문화도 만들어 내었다. 차는 국가가 주관하는 큰 불교 의식에서도 쓰였는데, 연등회와 팔관회가 바로 그것이다. 연등회는 정월 보름에 등불을 밝혀놓고 술과 다과를 먹으며 음식과 춤을 베풀어 부처님께 복을 비는 행사였다. 팔관회는 음력 11월에 등불을 환하게 켜 놓고 술과 다과를 성대하고 베풀어 천신을 위로하고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비는 행사였다. 이 같은 국가 차원의 불교 의례를 통해 사찰음식은 더욱 발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차를 마시는 풍습이 생기면서 차와 곁들여 먹을 유밀과와 다식도 함께 발달하게 된다. 유밀과는 밀가루에 참기름과 꿀을 섞어 반죽을 만들어 일정한 모양을 만들고, 이를 기름에 지진 뒤 다시 꿀을 묻힌 것인데, 제사나 연회, 잔치, 결혼식 등에 두루 쓰였다. 하지만 유밀과를 만들기 위해서는 곡물, 꿀, 기름 등의 소비가 많아야 했고 이로 인해 물가가 오르고 민생이 힘들어지는 등 부작용이 생겨 유밀과 금지령이 수차례 내려지기도 했다. 다식은 곡물에 꿀을 섞어 다식판에 박아 내어 제사, 혼례 등에 올렸다. 

 

조선시대

숭불시대였던 고려시대와는 정 반대로 조선시대는 유교를 숭상하며 불교를 배척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펼친다. 하지만 조선 초기에는 여전히 왕실의 왕이 개인적으로 불교를 옹호하고 있었고, 백성들 또한 불교에서 종교적 위안을 얻고 있어 전통종교로서 명맥을 이어 올 수 있었다. 왕실 중심의 호국 불교였던 기존의 불교 성격이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민중불교로 바뀌게 된 것이다. 민생들의 식생활에도 변화가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시대와 별 차이가 없었지만, 16세기 무렵부터 유교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불공할 때 쓰이던 음식 중 하나였던 차와 유밀과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의 불교는 백성들의 생활에 깊이 파고들었고 자연히 서민들의 음식문화에도 영향을 주고받으며 사찰음식 또한 조금 더 토속적인 분위기를 갖게 되었다. 

조선후기(17세기~18세기)에는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의 발생으로 '보릿고개'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살림살이가 힘들었다. 주린배를 채우기 위해 백성들은 뭐든 먹어야 했기에 산속에 가서 풀이나 열매 등 식용가능한 것은 뭐든지 찾아내어 먹었고, 심지어 나무껍질을 먹기도 하였다. 이런 경험은 나물과 김치로 대표되는 우리나라의 채식 음식 문화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은 외부와 잦은 교류가 힘든 깊은 산속에 위치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스님들은 사찰 주변의 산물을 이용하여 먹거리를 마련했다. 또한 각 사찰의 조립법은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 아니라 세속과 격리된 상태로 구전으로 전해왔기에, 똑같은 명칭의 음식이라 하더라도 각 사찰마다 그 조리법도 맛도 달라지게 되었다.

 

 

현대 

근현대에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큰 사건을 많이 겪었다. 일제 신민지와 광복, 6·25 사변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변동을 겪으면서 우리 국민의 생활은 매우 힘들었고, 식생활도 자연히 영향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서면서 눈부시게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루어 내고, 식품도 공업화가 이루어져 식품 산업이 본격적으로 생기기 시작했다. 이때 가공식품과 청량음료 같은 기호 식품도 등장하게 된다. 그로부터 시간이 더 흘러 1980년대가 되면 고도의 경제성장과 소득증대가 이루어지고 국민들의 식생활도 점차 서구식으로 변화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곡류와 채소 위주로 먹던 일상식은 동물성 단백질, 지질의 섭취가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식습관은 자연히 열량이나 지방, 당질을 과도하게 섭취하게 만들었고 여러 가지 퇴행성 질환의 발병을 높여 당뇨병, 고혈압, 고지혈증 환자가 늘어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에 반해 전통 사찰음식은 옛 모습을 비교적 잘 유지하며 전승되었고 그래서 여전히 먹을수록 건강해지는 음식으로 남을 수 있었다. 사찰음식은 현대인이 부족하게 섭취하기 쉬운 식물성 식품을 주된 식재료로 사용하고 화학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으며, 조리법도 간단하고, 양념도 절제해서 사용하기에 그 맛이 깔끔하고 담백하다 할 수 있다. 육식을 하지 못해서 발생할 수도 있는 단백질은 콩을 이용한 각종 요리로 양질의 단백질을 얻고, 콩기름, 들기름 등 식물성 기름에서 건강한 지방산을 섭취한다. 이러한 사찰음식의 특성을 고려할 때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만성질환의 예방 및 치료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