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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음식/사찰음식에 관하여

사찰음식의 역사

by 오몽실 2024. 10. 15.

라오스 스님들의 탁발
라오스 스님들의 탁발 (출처- 불교신문)

 

초기불교 - 걸식

 

 사찰음식이 부처님 당시부터 존재한 것은 아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에는 탁발을 해서 수행자들이 식사를 해결하였다. 탁발은 산스크리터어인 '핀타파타'를 뜻에 맞게 번역한 것으로 수행자들이 수행자의 식기인 발우를 들고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가서 음식을 얻는 행위를 말한다.

 

 즉 탁발이란 걸식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출가 수행자는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고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하였기에 음식은 오롯이 재가자의 보시로 얻을 수 있었다. 하루에 한 번 다 같이 마을에 들어가 기러기 떼처럼 줄을 지어 걸으며 재가자들이 공양하는 음식을 얻었다고 한다.

 

 물론 이때 음식에 대한 선택권은 없었고, 아무 음식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침에 탁발을 하지 못하면 그날은 하루 종일 굶어야 했고 이로 인한 잡음이 생길 수 있어 탁발에는 엄격한 규칙들이 생겼다. 예를 들면 음식은 항상 걸식으로 해결할 것, 걸식을 할 때에는 가난한 집과 부잣집을 가리지 않고 차례대로 할 것, 그리고 하루에 한 끼만 먹을 것 등이었다. 이외에도 '칠 가식'이라 하여 밥을 얻을 때에 일곱 집을 넘기지 않는다거나 한 번 갔던 집을 다시 찾아가면 안 된다는 규정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탁발을 통해 수행자는 아만심을 없애고 재가자는 보시의 공덕을 쌓는 수행을 했던 것이다.

 

  부처님 재세 시에는 앞서 잠시 말한 것처럼 하루에 한 번 탁발한 음식을 공양했다. 이것을 '일종식'이라 부른다. 그리고 오후 불식으로 오후에는 아무런 음식도 섭취하지 않았다. 정오가 지나면 밥을 먹는 때가 아니라 여겼고 음식을 남겨 두었다가 나중에 먹는 일도 금지되었기에 음식을 조리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신도들이 주는 대로 먹는 것이어서 별도로 사찰음식이라 부를 만한 것은 없었다.

 

 

먹어도 되는 고기의 종류

 

 부처님과 제자들을 공양하겠다는 재가신도들의 열의가 심해지면서 사가라는 장군이 직접 소를 잡아 공양을 하려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먹어도 되는 고기의 종류에 대해 언급을 하신다. 삼종정육, 오종정육, 구종정육이 그것이다. 

 

 삼종정육은 율장에서 먹어도 된다고 허용한 세 가지 종류의 고기를 일컫는데 자신을 위해서 죽이는 것을 직접보지 않은 짐승의 고기, 남으로부터 그런 사실을 전해 듣지 않은 고기, 자신을 위해 살생했을 것이란 의심이 가지 않는 고기를 말한다. 오종정육은 삼종정육에 수명이 다하여 자연히 죽은 오수의 고기, 맹수난 오수가 먹다가 남긴 고기를 더한 것이고, 오종정육에 자신을 위해서 죽이지 않은 고기, 자연히 죽은 지 여러 날이 되어 말라붙은 고기, 미리 약속함이 없이 우연히 먹게 된  고기, 일부러 죽인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고기를 더하여 구종정육이라 한다. 

 

 걸식으로 음식을 해결하던 상황에서는 신도들이 주는 음식 가운데 고기만 따로 골라내어 버릴 수는 없었기에 특별한 금지가 없었지만 수행자에게 공양을 하려고 살생을 하는 것은 막기 위한 방편이라 할 수 있다.

 

 

정주생활의 시작 - 사찰음식의 발생

 

 부처님 재세 시 초기에는 이곳저곳을 이동하며 다니는 유행생활을 하는 시기였다가 점차 신도들이 사찰을 지어 기증하고 그 안에서 생활을 하는 정주생활이 시작되었다.「사분율」의 '집과 방에 관한 법' 편에는 부처님께서 물 데우는 집, 나무광, 부엌을 지으라고 허락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를 토대로 당시 사찰에 화장실이나 부엌, 목욕탕과 같은 시설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부엌과 같은 음식을 조리하는 용도는 아니었고 간단히 발우를 씻거나 물이나 밥을 끓이는 정도의 용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장, 소금 같은 기본양념은 구비가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즉, 탁발을 해온 음식을 먹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인 것이다. 

 

 이후 시간이 더 흘러 불교가 세계 여러 나라도 전파되면서 각 나라의 사정이 맞게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탁발과 오후불식이라는 틀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더불어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 승원이 발달하게 되면서 탁발의 관습이 약해지고 석굴사원이 등장하면서 음식물을 조리, 저장하는 일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급작스레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서서히 변화되어 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음식을 조리하는 공간이나 먹는 공간이 사찰 밖에 따로 배치된 형태였다가 점점 사찰 내부에 조리공간과 식당이 존재하는 형태로 변화한 것이다. 물론 오늘날까지도 남방불교권에서는 탁발에 의한 식생활을 지키는 곳이 있다.

 

중국의 사찰음식 - 일일부작 일일불식( 一日不作 一日不食)

 불교가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탁발과 오후불식의 방식은 새롭게 변화하게 되는데 가장 큰 이유는 '기후'라고 할 수 있다. 따뜻한 남방과 달리 추운 북방에서는 수행자들이 하루 한 끼만 식사를 해서는 건강을 지키기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수행자들에게 음식을 보시하는 풍습이 없었던 당시의 중국에서 수행자들이 음식을 얻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초기에 불교의 가장 큰 우호 세력이었던 왕실과 부유층이 사찰에 기증한 토지와 재물로 생활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사찰과 수행자들의 생활이 지나치게 풍요로워지면서 이에 대한 반성으로 '선종'이 등장하게 된다. 

 

 중국 선종의 대표적 인물인 '백장 선사'는 기존의 사원 관습을 거부하고 선종사찰의 윤리를 지어 공동노동을 의무화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유명한 청규는 이때 등장하게 되었고, 이후 북방불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선종이 등장하고, 그로 인해 수행자들이 노동을 하게 되면서 일종식 원칙은 지키기 더 힘들어졌다. 고된 육체노동을 하면서 하루 한 끼만을 먹는 것은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침에는 죽을, 점심과 저녁 등

하루 세끼를 먹는 것으로 변화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적게 먹고, 때 아닌 때에 먹지 말라는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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