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에서는 스님들이 함께 모여 사는 대중생활을 한다. 이런 대중은 적게는 몇 명이고 많게는 수백 명에 이른다. 대중이 적든 많든 절에서 행해지는 법회나 다양한 행사를 치르려면 여러 가지 할 일이 생기게 마련인데, 이때 스님들이 일의 역할을 분담하고 그 일에 각자가 책임을 맡도록 정하는 것을 '소임을 맡는다'라고 한다.
스님들이 수행을 하는 안거 기간 동안 소임자를 정하는 일은 부처님 당시부터 존재했다. 초기 불교 기간 동안 승방에는 많은 수의 비구들이 모였지만 규율이 없다 보니 크고 작은 일들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부처님은 대중생활에 필요한 소임을 지정하여 약 담당, 옷 담당, 탁발 시간을 정하는 담당 등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소임자를 정하셨다. 그리고 이들 소임자들을 총 감독할 책임자도 뽑았는데 그 책임자를 '유나'라고 한다. 소임자를 뽑을 때는 부처님께서 자격 기준만 정해주고 비구들 스스로 뽑았다.
스님들의 소임 중에 공양과 관련한 소임이 생긴 것은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된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인도에서는 탁발로 공양을 해결하였지만 중국에서는 정주생활을 통해 농사와 수행을 동일시하며 자급자족했기 때문에 음식을 마련하는 일과 관련한 소임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소임제도를 최초로 시행한 사람은 당나라의 백장 선사다. 당시 선원의 생활규율을 정리한 「선원청규」에는 모두 23개의 소임이 등장하는데 이후 이 소임은 시대에 따라 혹은 사찰 운영의 필요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다.
스님들의 여러 가지 직책가운데 음식 만들기와 관련된 소임은 다음과 같다.
전좌
부엌에서 먹거리를 담당하는 소임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별좌'라고 한다. 예부터 "수좌(앉아서 참천하는 스님)는 마음을 다스리고 전좌는 몸을 다스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좌의 역살은 중요했다. 별좌는 사 미니계(행자와 비구니 사이의 단계)를 받고 예비 승려들이 가장 먼저 후원(부엌)에서 맡는 상소임이다. 6개월에서 1년에 이르는 행자 기간 동안 익힌 솜씨를 발휘하는 소임이기도 하다.
전좌는 모든 음식물을 정성과 청결로 다루고, 아끼고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밥이나 죽이 다 되면 먼저 부처님 전에 올리고 향을 피운 다음 절을 한 후에야 식당에 올린다. 부처님께 올리는 채소는 반드시 익혀야 하고, 먼저 맛을 봐서도 안 된다. 스님들이나 손님이 먹을 음식은 먼저 맛을 보고 좋은 맛이 나도록 해야 한다.
반두
우리나라에서는 '공양주'라고 한다. 밥 짓는 소임을 하는 직책이다. 공양주는 향을 올리며 솥을 열고 밥과 죽을 먼저 부처님께 올린 뒤 재당, 객당, 산료, 원방, 노당, 병당 순으로 나눈다. 밥이 남으면 신속하게 처리해서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예전에는 여름이 밥이 남으면 여러 번 깨끗이 씻어 말린 뒤 튀겨먹었다고 한다. 음식을 함부로 버리지 않는 것이다.
채두
우리나라에서는 '채공' 이라고 한다. 반찬 만드는 일을 한다. 하루 세 번 반찬을 만들고 별좌의 지시를 받는다. 반찬 역시 깨끗하게 만들고 요리할 때 어지럽히지 말아야 한다.
화두
불을 지피는 소임인데 우리나라에서는 '화대'라고 한다. 스님들이 정진하기 좋게 방에 불을 지피는 소임이다. 그 온도는 너무 뜨겁지도 너무 춥지도 않게 요령껏 맞춰야 한다. 화재가 나지 않도록 철저히 예방해야 하는데 아궁이 부근에 땔나무를 쌓아 두어서는 안 되고, 불을 끌 때는 아궁이 앞을 먼저 청소를 해야 하며, 굴뚝은 매월 초순에 한 번씩 청소를 한다.
수두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물을 담당한다. 수두는 부엌과 차 마시는 방과 각 당에서 쓰는 물을 관리한다. 늘 깨끗한 물이 가득 차 있도록 하며, 필요한 물은 모자라지 않게 잘 공급해 주어야 한다. 물을 주는데 인색하게 굴거나 화를 내어서는 안 된다. 물통은 다 쓰고 나면 엎어 놓고, 여름철에는 정수 주머니를 옆에 두고 물을 걸러서 쓴다.
마두
마른 것과 물기 있는 알곡식을 갈아서 가루로 만드는 일을 한다. 마른 것은 밀, 보리를 말하여 물기 있는 것은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드는 일을 가리킨다.
그 외 소임
이 외에도 사찰의 살림을 총괄하는 원주, 양곡의 출납을 담당하는 미두, 대중이 마실 차를 준비하는 다각, 국을 끓이는 소임인 갱두,갱두, 땔감을 구해 오고 각종 허드렛일을 맡아하는 부목이 있고, 사찰에서 각종 재가 있을 때 상에 올렸던 음식을 각각 조금씩 걷어서 옥외의 헌식대에 가져다 놓는 직책을 맡은 헌식이라는 소임이 있다. 밥을 짓는 공양주와 국을 담당하는 갱두, 큰스님과 대중 스님들 그리고 객실에 머무르고 있는 신도들을 위한 상을 준비하는 간상도 있다.
사찰에서 안거나 큰 행사가 있을 때면 소임을 정하고, 각자 맡은 바 정해진 소임을 써서 모두가 잘 볼 수 있는 곳에 붙여 놓는데 이를 '용상방'이라 한다. 용상이란 수행자를 비유한 말로 물에서 으뜸인 용, 그리고 땅에서 으뜸인 코끼리를 합친 말이다. 용상방에 써서 안거나 행사가 끝날 때까지 맡은 바 충실히 책임을 진다.
민가에서 부엌이라 부르는 조리공간을 사찰에서는 '후원' 또는 '공양간'이라 한다. 후원에서는 이제 막 출가한 행자들이 사찰 생활을 배우기도 한다. 채공, 갱두, 원두 같은 주요 소임은 스님들이 맡고 그 아래 허드렛일을 행자가 담당한다. 밥을 지을 때 장작을 때어서 하는 경우가 있는데 장작으로 밥이나 죽을 잘 짓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밥이 다 되고 공양 준비가 되면 공양주는 조왕단에 공양을 올린 후 죽비를 치며 게송을 외운다. 조왕단 예경이 끝나면 공양주는 밥을, 갱두는 국을, 채공은 반찬등을 준비해 상에 담아낸다. 이렇듯 한 번의 공양도 수많은 스님들이 각자의 소임에 노고를 아끼지 않은 결과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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